빈자리의 온도 #3~4

3장. 포차의 냅킨

그날 밤은 유난히 바람이 차가웠다. 우리가 자주 가던 골목 포차, 이모가 눈치껏 소주를 갖다 주고 자리를 피해주는 그곳에 우리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민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있잖아, 나 이번 달도 통장 마이너스야. 재혁이 또 카드 게임한다고 주말 내내 나가 있었어. 전화하면 바빠, 한마디야. 뭐가 바빠?”

나는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너희 남편은 너한테 관심이라도 있잖아. 우리 준혁은 나한테 관심 자체가 없어. 지난 생일에 뭐 해줬는지 알아? 케이크 하나 사 왔는데 초도 안 꽂았어. 상자째 테이블에 올려놓고 생일이네, 가 끝이야.”

민지가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그게 낫지. 관심 없는 척이라도 하면 돈은 안 써잖아.”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돈 써도 설레는 게 낫지. 나는 설렌 지가 언제인지도 모르겠어.”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잔을 기울였다. 포차 천장에 달린 전구가 노랗게 흔들렸다. 이모가 오징어 한 접시를 더 갖다 놓고 사라졌다.

민지가 불쑥 말했다.

“야, 우리 둘이 남편 취향이 딱 바뀌어 있는 거 알지? 너는 로맨스 원하고, 나는 안정 원하고. 차라리 우리 남편 바꾸면 딱이겠다.”

나는 피식 웃었다. 농담으로 흘려들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주 서너 잔이 몸속에서 돌고 있었다.

“그럼 바꿔볼까? 진짜로.”

민지가 잔을 내려놓으며 나를 쳐다봤다.

“진짜로?”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1년만. 집은 그대로 두고 남편만 바꾸는 거야. 우리 둘 다 아이도 없잖아. 딱 1년, 해보고 아니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야.”

민지가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천천히 웃었다.

“너 진심이야?”

“술 깨면 생각해봐. 나는 지금은 진심인 것 같아.”

그날 우리는 냅킨 한 장에 대충 조건들을 적었다. 기간은 1년. 집은 각자 상대방 남편의 집으로 이동한다. 감정적 책임은 묻지 않는다. 1년 후 어떤 결정이든 서로 존중한다.

다음 날 아침, 민지 문자가 와 있었다.

“나 기억해. 너는?”

나는 한참을 천장을 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기억해. 해보자.”

준혁에게 말을 꺼낸 건 그날 저녁이었다. 그는 저녁을 먹다가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처음에는 농담으로 듣는 것 같았다. 내가 계속 말을 이어가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1년이야. 이 결혼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서 그래.”

“그게 지금 이런 식으로 해결되는 문제야?”

“모르겠어. 그냥 해보고 싶어.”

준혁은 식탁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재혁도 마찬가지였다. 민지에게 전화기 너머로 거친 소리가 돌아왔다고 했다. 두 남자 모두 완강했다.

일주일이 지나도 결론이 나지 않자, 민지와 나는 이혼 서류 양식을 출력해 이름만 써놓았다. 눈에 보이는 종이는 달랐다.

준혁 앞에 그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야. 나는 지금 이 결혼이 괜찮은지 아닌지를 모르겠어. 이게 안 되면 나는 이 서류를 진짜로 쓰게 될 것 같아.”

준혁은 종이를 보더니 한참 침묵했다. 그러다가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1년이야. 그 이상은 없어.”

재혁도 결국 같은 말로 합의했다. 민지의 눈물이 한몫했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의 기묘한 1년이 시작되었다.

4장. 첫날밤 — 각자의 어색함

짐을 옮기는 날은 토요일이었다.

준혁이 민지 집으로, 나는 재혁 집으로. 우리는 각자 캐리어 하나씩을 끌었다. 민지와 나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마주쳤다. 캐리어를 끌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서로를 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 것 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민지가 먼저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재혁 집은 우리 집과 구조가 비슷했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거실에 간접 조명이 있었고, 쿠션이 많았고, 냄새가 달랐다. 낯선 집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재혁은 나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어서 와요. 뭐라고 불러야 하지. 지수 씨? 형수님?”

나는 웃음이 나왔다. 어색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한 웃음이었다.

“그냥 지수라고 해. 나도 재혁 씨라고 부를게.”

“재혁 씨. 어색한데.”

“어색하지. 당연히.”

저녁을 먹고 나서가 문제였다. 재혁 집은 안방과 작은방이 있는 구조였는데, 재혁은 안방을 쓰고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봤다. 어느 쪽도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공기가 묘하게 긴장됐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재혁이 먼저 일어나며 말했다.

“나 안방에서 잘게요. 지수 씨는 작은방 편하게 쓰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혁은 안방 문을 닫았다. 나는 작은방에 누워 담요를 끌어당기며 천장을 봤다. 낯선 천장이었다. 낯선 냄새. 낯선 어둠. 잠이 오지 않았다.

한편, 민지는 그날 준혁 집에서 첫날을 보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였다.

준혁은 민지를 맞으며 딱 한마디를 했다고 했다.

“안방은 내가 쓸게. 작은방 불편하면 말해.”

그게 끝이었다. 저녁도 각자 먹었다. 준혁은 밥을 차려두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민지는 혼자 밥을 먹으며 이게 맞나 싶었다고 했다.

“진짜 아무 말도 없더라. 숟가락 소리만 나고. 재혁이랑 첫날에 얼마나 떠들었는지 아는데, 그 집은 도서관 같았어.”

나는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우리 집은 원래 그랬다.

“집이 왜 이렇게 조용해. 거실에 시계 소리가 다 들리더라고.”

“원래 그래. 준혁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그 말이 한동안 귀에 맴도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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