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스무 날의 끝
종료까지 이십 일이 남았을 때, 재혁이 새벽에 취해서 들어왔다.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채권자에게 연락이 왔었던 모양이었다. 재혁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다가 갑자기 옆에 있던 잡지를 집어 던졌다. 그러다가 나를 쳐다봤다.
“야, 당신도 돈 있잖아. 좀 도와줄 수 없어? 잠깐이면 돼.”
나는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뭔가가 식어버리는 걸 느꼈다.
“미안해. 그건 어려워.”
“어렵긴 뭐가 어려워. 잠깐이라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작은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지고 있었는데, 그게 재혁에 대한 마음인지 아니면 내가 그동안 붙잡고 있던 환상인지 알 수 없었다.
이튿날 재혁이 잠든 사이 나는 겉옷을 걸치고 집을 나왔다. 택시를 잡고 목적지를 말할 때 준혁 집 주소가 나왔다.
초인종을 누르려는데 문이 먼저 열렸다. 준혁이 서 있었다. 집 안에서 고기를 오래 끓인 것 같은, 진하고 따뜻한 냄새가 났다. 현관에 낯선 슬리퍼가 있었다. 민지 것이었다.
준혁은 손에 과일 칼을 들고 있었다. 반쯤 깎다 만 사과였다.
“나 잠깐 와도 되겠어?”
준혁은 아무 말 없이 비켜섰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눈물이 올라왔다.
“나… 후회해. 이거 끝나면 원래대로 돌아오면 안 될까.”
준혁이 과일 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내가 읽을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 한참 뒤에 그가 말했다.
“민지가 임신했어.”
머릿속이 멈추는 것 같았다. 나는 소파에서 그대로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방문이 열렸다. 민지가 잠옷 차림으로 나왔다. 배에 손을 얹고 있었다. 나를 보는 눈빛이 조용했다. 동창회에서 봤던 그 눈빛보다 더 깊고 더 조용한 무언가가 거기 있었다.
“지수야.”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익숙하고 낯설었다.
“이 1년이 없었으면, 나도 몰랐을 거야. 내가 원하는 게 두근거림이 아니라 옆에서 잠드는 것이라는 걸. 고마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민지가 미안해하지 않는 게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이 삶 안에 들어와 있었고, 나는 아직 문 앞에 서 있었다.
새벽 바람을 맞으며 나는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15장. 서류, 그리고 짐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 날은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다.
법원 민원실 앞에서 준혁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창밖을 보았다. 사람들이 오갔다.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준혁이 왔다. 단정하게 입고 왔다. 셔츠가 다려져 있었다.
서류를 마주하고 앉아 서명란 앞에서 나는 잠깐 멈췄다. 할 말이 있었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준혁이 먼저 펜을 들어 서명했다. 나는 그 손을 보다가 내 차례가 됐을 때 천천히 이름을 적었다.
복도를 나오면서 눈물이 났다. 억지로 참지 않았다.
재혁과의 관계는 그보다 먼저 흐지부지 끝났다. 채권자 문제가 커지면서 재혁은 연락이 뜸해졌다. 나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어느 날 대화창을 보다가 그냥 닫았다.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뭐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준혁과 민지는 봄에 식을 올린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조용히 하겠다고 했다는 것도.
나는 짐을 쌌다. 서울을 떠나기로 했다. 고향 집이 있는 곳으로. 박스를 접고, 물건들을 넣고, 테이프를 붙이면서 나는 감각이 무뎌지는 걸 느꼈다. 슬프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냥 너무 많이 느껴서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상태였다.
박스 하나에 귀걸이가 들어 있었다. 명절에 재혁이 선물한 것. 버리기도, 간직하기도 뭣했다. 한참 손에 쥐고 있다가 결국 박스 안에 넣었다. 뚜껑을 닫았다.
이삿날 새벽, 짐을 다 뺀 재혁 집 빈 방을 한 바퀴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는데, 이상하게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된장찌개도, 닭곰탕도, 누군가 오래 살았던 집의 냄새도 없었다. 그냥 빈 방의 냄새였다. 나는 그 없음이 왜인지 한 번 더 아팠다.
나는 문을 닫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