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균열은 소리 없이 왔다
여덟 달이 지나면서 작은 것들이 눈에 걸리기 시작했다.
재혁이 카드 게임 모임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자정이 넘는 날이 잦아지더니 새벽 두 시, 세 시가 됐다. 어느 날 재혁의 핸드폰이 식탁 위에 켜진 채로 놓여 있었다. 나는 볼 마음이 없었는데, 눈이 먼저 봤다. 모르는 이름의 문자였다.
물었더니 재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카드 게임 모임에서 알게 된 사람이야. 별거 아니야.”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묻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들을 대답이 두려웠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보일러가 고장 났다. 온수가 나오지 않고 욕실 바닥에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재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보일러가 이상해. 물이 새고 있어.”
전화기 너머가 시끄러웠다. 남자들 웃음소리, 카드 섞는 소리.
“나 지금 자리야. 수리 업체 불러. 번호는 인터넷에 검색하면 돼.”
전화가 끊겼다. 나는 걸레를 들고 물을 퍼내면서 갑자기 준혁이 떠올랐다. 그 사람은 이런 전화를 받으면 어떻게 했더라. 모임 중이어도 먼저 집에 왔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공구함을 꺼내 들었다. 손이 새까매지도록 고치고 나서 생색 한 번 낸 적이 없었다.
업체가 오기까지 한 시간이 넘었다. 수리가 끝나고 나서 재혁의 가방에 영수증을 넣으려다가, 안에서 서류 봉투들이 쏟아졌다. 카드 연체 안내, 대출 상환 독촉, 법무사 사무소 발신 서류. 합산 금액이 억 단위였다. 날짜를 보았다. 내가 재혁과 코스 요리를 먹던 날들, 가방을 산 날들과 고스란히 겹쳤다.
나는 서류들을 봉투 안에 다시 넣고 소파에 앉았다.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설렘의 뒷면에 이런 게 있었구나.
13장. 마트 안의 두 사람
열한 달이 지난 어느 주말, 집 근처 대형마트에 혼자 장을 보러 갔다가 익숙한 뒷모습을 봤다.
준혁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민지가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옆 진열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눈은 계속 그쪽으로 갔다.
준혁이 딸기 한 팩을 집어 들고 뒷면 스티커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이거 괜찮긴 한데 만 원이 넘네. 이번 달은 좀 아껴야 해.”
민지가 딸기를 내려놓으며 웃었다.
“알겠어, 당신 말 들을게. 대신 나 요거트는 사줘.”
“그거야 당연하지.”
준혁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트를 밀어 냉장 코너 쪽으로 향했다. 민지가 좋아하는 요거트 브랜드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묻지도 않고, 확인하지도 않고. 오래 함께 살아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손놀림이었다.
그때 준혁이 입고 있는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색이 좀 바래고 디자인도 수수한 그 셔츠. 나는 그 셔츠를 볼 때마다 속으로 구박했다. 좀 새 걸 사라고. 그런데 지금 그 셔츠는 반듯하게 다려져 있었다. 목 부분의 주름 하나 없이. 민지가 다린 거였다.
나는 한 번도 그 셔츠를 다려준 적이 없었다.
진열대 뒤에서 나는 오래 서 있었다. 카트 손잡이를 꽉 쥔 채로. 두 사람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