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여섯 달, 명절의 하루
반년이 지났다. 명절이 왔다.
우리는 명절 당일만큼은 원래 부부로 돌아가서 각자 시댁에 인사를 가기로 했었다. 준혁 시댁은 경기도 외곽이었다. 시어머니는 내가 오자 두 손을 잡으셨다.
준혁은 시댁에 도착하자마자 부엌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도왔다. 조카들이 달려들어 목을 타고 올라가도 끄떡없이 받아줬다. 시어머니가 거실에 앉아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셨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혁이 눈으로 물었다. 벌써 가냐는 눈빛이었다.
“먼저 가야 해. 저쪽도 가봐야 해서.”
그게 재혁 집이라는 걸 준혁은 알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명절 음식을 잔뜩 싸 주셨다. 나는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택시를 잡았다.
명절 연휴 고속도로는 막혔다. 두 시간을 달려 재혁 집에 도착했을 때, 재혁은 작은 상자를 들고 나왔다.
“명절 선물이야. 마음에 들면 좋겠다.”
열어보니 귀걸이였다. 작고 단아한 것이었다. 예뻤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귀에 달았다. 재혁이 웃었다. 나도 웃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싸 주신 음식 통이 가방 안에서 무겁게 느껴졌다.
그날 밤 불을 끄고 누우면서, 나는 이상하게 된장찌개 냄새가 떠올랐다. 재혁 집에는 없는 냄새였다.
11장. 동창회 — 너는 괜찮아?
일곱 달이 지날 무렵, 대학 동창회가 있었다.
민지와 나는 같은 과 출신이었다. 동창회 날짜가 잡히자 단체 채팅방이 시끌시끌해졌다. 우리는 따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아도, 당연히 같이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짐을 옮긴 날 주차장에서 잠깐 손을 흔든 뒤로, 민지와 제대로 마주 앉아 이야기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식당 입구에서 마주쳤을 때, 민지는 평소보다 밝은 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도 새로 한 것 같았다. 그리고 표정이 달랐다. 뭔가가 달랐는데, 처음엔 정확히 뭔지 몰랐다. 보다 보니 알았다. 민지가 자꾸 웃었다. 이유 없이, 그냥 자꾸 웃었다.
식당 안에는 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 반갑다는 인사, 근황 교환. 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누군가가 민지를 향해 말했다.
“민지야, 너 오늘 왜 이렇게 좋아 보여? 무슨 일 있어?”
민지는 손을 저으며 웃었다.
“아니야, 별거 없어. 요즘 잠을 잘 자서 그런가.”
“잠을 잘 자? 그게 비결이야? 나 요즘 새벽 세 시 전에 잠든 적이 없는데.”
“그러게, 잘 자는 게 최고야. 피부도 좋아지고.”
웃음이 번졌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흘렀다. 하지만 나는 민지를 계속 눈으로 좇았다. 그 표정. 편안하고, 환하고, 가득 찬 것 같은 표정. 나는 그게 언제 봤던 표정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밥을 먹고 나서 무리는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넓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며 떠들었다. 어떤 사람은 아이 이야기를 했고, 어떤 사람은 이직 준비 이야기를 했고, 어떤 사람은 남편 잔소리가 늘었다며 웃으며 불평했다. 나는 열심히 웃었다.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어딘가 공기 반 발짝 바깥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두어 시간이 지나고 무리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동창회 날짜를 정하고, 사진을 찍고,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를 나눴다. 마지막에는 민지와 나만 남았다.
우리는 카페 구석 자리에서 커피잔을 손에 쥔 채 마주 앉았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의 카페는 조용했다. 창밖으로 저녁이 내려앉고 있었다.
민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잘 지내고 있어?”
“응. 잘 지내. 너는?”
“나는 좋아.”
민지가 짧게 말했는데, 그 좋아라는 말이 진심이라는 게 바로 느껴졌다. 그냥 인사치레로 하는 좋아가 아니었다.
내가 먼저 물었다. 재혁이라는 이름을 꺼내는 게 이상하게 어색했다. 민지의 원래 남편, 지금 내가 함께 사는 남자, 그 경계가 말 위에서 뒤섞였다.
“재혁이가 잘해줘?”
민지가 잠깐 커피잔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말했다.
“응. 잘해줘. 그것보다…”
민지가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준혁 씨가 너무 좋아. 그 사람 옆에 있으면 아무 걱정을 안 해도 될 것 같아.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같이 있으면 그냥 편안해. 재혁이랑 살 때는 항상 뭔가를 챙겨야 한다는 느낌이 있었거든. 근데 준혁 씨 옆에서는 그냥 나일 수가 있어.”
민지가 말하는 내내 눈이 빛났다. 거짓이 없는 눈이었다. 나는 그 눈을 보면서 가슴 어딘가가 조용히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나는 웃었다. 자연스럽게 웃으려고 했는데, 입꼬리가 살짝 늦게 올라간 것 같았다.
“그렇구나. 잘됐다.”
민지가 나를 보더니 눈을 약간 좁혔다.
“야, 너는? 재혁이 잘해줘?”
“응, 잘해줘. 로맨틱하잖아, 원래.”
“그렇긴 한데.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나는 순간 멈칫했다. 표정이 어떻게 보였던 걸까.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요즘 잠을 못 잔 것 같아.”
“진짜야?”
“응. 진짜야. 너처럼 잘 자는 법 좀 알려줘.”
민지가 잠깐 나를 보더니, 그냥 웃으며 넘어갔다.
“그거야 준혁 씨가 옆에 있으면 돼. 그 사람 숨소리가 얼마나 고른지 알아?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잠들어.”
민지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하지만 카페를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창문에 이마를 살짝 기댔다. 어두워진 창밖이 흘러갔다. 민지의 눈빛이 자꾸 떠올랐다. 그 가득 찬 눈빛이.
재혁과 함께 있을 때 나는 설렌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민지의 그 표정은 설렘이 아니었다. 설렘보다 더 조용하고 더 깊은 무언가였다. 나는 그게 뭔지 이름을 붙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